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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투어.
옛 조선왕조의 도성 주변에 쌓였던 성벽을 역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투어 이다.
한양 도성 전체의 길이는 대략 18.627Km 이다. 성벽이 쭉 이뤄져 있지는 않고 중간에 도로나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 한양 도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 모두 8개의 성문이 있다.
한양 도성을 돌면서 스탬프를 찍으면 나중에 완주기념배지를 받을 수 있다.
한양 도성을 따라 걷는 순성길은 서울의 내사산(백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고, 사대문(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 터)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지나는 총 18.6Km의 역사와 문화 체험의 길이다.
봄에 1번, 이번에 1번을 통해 스탬프를 총 3개를 찍을 수 있었는데 준비성이 부족한 관계로 못 찍었다는 슬픈 현실.. ㅠ.ㅠ
해설과 함께 한양도성 투어를 할 수 있다.
예약 사이트
종로구청 : http://tour.jongno.go.kr
중구청 : http://www.junggu.seoul.kr/tour
을 통해서 예약 할 수 있다.
상시 출발도 있고 일요일 출발도 있다. 개인별 일정에 맞춰서 신청하면 된다.
6개의 구간이 있는데 해설이 있는 도성투어에서는 4개의 코스로 나눠서 진행이 된다.
봄에는 4코스를 다녀왔고 이번에는 1코스를 다녀왔다.
아이들 체력이 괜찮은 편이라면 초등 저학년도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는 코스이다. 우리 아이들은 평소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으로 별 무리없이 두코스 완주했다. 가족과 함께라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2,3 코스는 가보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론 4코스가 제일 힘든 구간일 듯 싶다. 4시간 30분..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무사히 완주.. 칭찬해~~
해설과 함께 도성투어를 하면 평소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고 옛 역사도 알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간단히 내사산과 사대문, 사소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 내사산은 한양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짓는 잣대가 되는 산이다.
백악산을 주 산으로 삼고 나머지 산들을 이어 한양 도성을 지었다고 한다. 처음 한양 도성을 지으면서 주산을 정할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주장이 서로 달랐다고 한다. 정도전은 백악산을,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길 원했다고 한다. 결국은 무학대사가 밀리고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서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한양 도성을 짓게 된다. 무학대사가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나라가 200년을 넘기지 못할거라고 했다는데 나름의 혜안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을 건국하고 200년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휘청거리는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사대문은 정도전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유교적인 사상을 따라 성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유교에서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 인,의,예,지,신을 꼽는데 '인' 덕목을 따서 흥인지문(동대문), '의'의 덕목을 따서 돈의문(서대문), '예'의 덕목을 따서 숭례문(남대문), '지'의 덕목을 따서 숙정문(북대문)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 덕목을 따서 보신각을 지었다고 한다. 문 이름의 나름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유교적 이야기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사대문 외에도 사소문이 있다. 창의문(북소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가리킨다.
이 8개의 성중에 서소문과 돈의문은 현재 터만 남아 있단다. 표지석으로 문이 있었던 곳이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 도심에 옛 조선왕조의 도성과 문이 아직 남아있다는 걸 성곽투어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일제의 무분별한 개발탓에 중간중간 맥이 끊기고 성문이 남아 있지 않은 곳도 있다고 한다.
건물의 일반 옹벽처럼 쓰이고 있는 성곽도 있단다. 지나면서 일반인의 눈으로 보니 그게 성벽의 일부였다는 걸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뭐든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성곽투어를 하고 난 다음에서야 성벽의 일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1차는 봄에 다녀왔고 이번에 2번째 성곽투어였다.
1코스 백악(북악)산 코스
한양 도성 코스중에서 도성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잘 되어 있는 코스라고 한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4코스를 완주해서 그런지 이번 코스느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 가을이라 그런지 단풍과 따스한 햇빛과 너무 아름다웠다.
창의문에서 집합.. 9시에 출발했다.
사진에 보이는 창의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문루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에 다시 세운 것우로,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옛 시대의 문 모습 그대로를 지니고 있는 문이라고 보면 된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문 윗쪽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 창의문 근처 부암동이 지네 모습을 하고 있어서 지네를 잡을 수 있는 봉황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또 문의 윗쪽이 둥근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는데 '홍예'라고 부른단다. 성문을 쌓을 때 '홍예'를 먼저 쌓고 난 후 성문의 벽을 쌓는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 돌들을 접합할 수 있는 시멘트 등도 없었는데 돌들의 무게중심등을 계산해서 돌을 고정하는 것 없이 저렇게 둥근 아치를 만들었다고 하니 조상들의 기술력이 가히 놀랍다.
예전에는 창의문과 숙정문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도록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북쪽은 음기가 강한 곳이라서 도성안으로 음의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북쪽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려면 혜화문까지 돌아서 가야 했다고 한다. 상당히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기운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니.. 하하 ^^;;;
아래 사진에 보이는 현판이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공신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글씨가 작아서 보이지도 않음..
사진에 문루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예전 숭례문 사고가 있어서 인지 이곳에는 적외선 감시기가 작동중이어서 조금만 가까이 가도 관리하시는 분이 나오신다. 멀리서 조심해서 관찰하는 걸로..
창의문을 본 후 옆쪽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탐방 신청서를 작성하는 곳이 나온다.
탐방 신청서 작성하기 전,, 화장실 들르기. 탐방 신청서 작성하는 쪽 옆으로 화장실이 있다. 이 곳에서 시작하면 말바위 안내소 까지 대략2-3 시간동안 화장실이 따로 없다. 이곳에서 꼭 화장실을 들러야 한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탐방 신청서 작성하기.
간단한 개인 신상을 적는다.
이곳 2코스 해설프로그램은 도전10시, 오후 2시에 운영이 되고 3~7월, 9월~ 11월 사이에만 운영되나 보다.
위에서 적은 출입 신청서를 작성한 후 창의문 안내소에 들어가서 신청서와 함께 신분증을 제출하면 된다. 아직 신분증이 없는 자녀 같은 경우에 신청서를 작성한 후 안내소에 들어가서 주민번호를 말해주면 부모와 함께 들어갈 수 있다. 혹시 몰라서 가족관계 증명서도 챙겨갔는데 없어도 입장 가능 했었다.
개인의 신분이 확인되면 번호표를 나눠준다. 그 번호표를 목에 걸고 다녀야 된다. 군사 지역이라서 허가되지 않은 개인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출입카드도 받고 이제 드디어 시작..
가을이라 그런지 시작하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도성과 나무와 돌계단이 너무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저 나무숲 저편으로 석파정(평평한 돌)이라는 곳이 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구나...
옛 김홍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너무 갖고 싶은데 김홍근이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에게 저곳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왕이 하루라도 잠을 잔 곳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는 점을 노렸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석파정이라는 곳을 흥선대원군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왕의 힘이 강한 조선시대라고 해도 신하의 것을 함부로 탐하는 것은 어려웠었나 보다.
석파정이라는 곳을 가보지 않아서 얼마나 예쁘길래 그리 탐했을까 싶은 생각이지만 옛 조선시대때는 석파정 주변으로 천이 흘렀다 하니 경치가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지금은 미술관에서 구입해서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 옆쪽으로 세검정이라는 곳도 있다는데 나무들에 가려서 어디인지 말로만 들어서는 알수가 없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석파정이랑 세검정터도 한번 가봐야 될 듯 하다.
세검정은 말그대로 검을 씻는 곳이라고 한다. 북방의 장군이나 군인들이 왔을 때 도성에 들어오기 전에 칼을 씻던 곳이라고 한다. 왕이 살고 있는 도성에 피 묻힌 칼 그대로 들어가면 안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오니 저 건너편으로는 봄에 올랐던 인왕선도 보인다. 반갑구나 인왕산~~
가파른 계단을 어느 정도 오르면 만나게 되는 돌고래 쉼터.
돌고래 쉼터로 불리는 이유는 쉼터 옆쪽에 돌고래 모양을 닮은 돌이 있어서 그 돌 모양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머리 모양이 살짝 돌고래 같긴 하다.
두번째 만나는 백악쉼터. 아까 돌고래 쉼터보다 더 높이 올라와서 그런지 시야가 확 틔인다.
백악쉼터 안내판
예전에는 사진에 보이는 곳에는 다 천이 흘렀다 하니 예전의 경치를 마음에 그려보니 상상이 안 간다. 지금 이리 봐도 예쁜데 내까지 흘렀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듯 하다.
다시 또 열심히 오르고 올라서 만나게 되는 북악산 정상. 해발 342m 이다.
중간에 쉼터마다 쉬면서 올라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금방 올라올 수 있었다. 중간에 쉼터에서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이곳 백악산 정상까지 1시간 20분 가량 걸렸다.
북악산 옛모습 복원에 관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북한군의 공중 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년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 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였다고 한다. 2000년 9월 9일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민족의 정기가 서려있는 북악산을 우리가 살고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영원한 삶터로 이루기 위해 옛 모습으로 복원한다고 한다.
본래 이 북악산 코스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때 탄핵후 판결이 나기 전까지의 시간을 이곳을 등산하며 보내다 그 이후에 일반에게 공개가 되었다고 한다. 일반에 공개가 되었기에 지금의 4개 코스의 도성투어가 가능했으리라.
이 날도 미세먼지가 많았는지 시야가 멀리까지 확보되진 않았다. 아쉽...
북악산 정상에서 발걸음을 되돌려 올라왔던 쪽 반대편으로 내려가 1.21 사태 소나무를 만나게 되었다.
실제 총알이 박혀 있던 부분을 표식화 해 뒀다고 한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 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결과 침투한 31명 중 1명 도주, 29명 사살 1명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로 실미도 영화에서 31명의 조직원들을 데려다 북한 김정일을 죽이기 위한 작전 훈련을 시키는데 실제를 바탕으로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청운대 방면으로 걷다 보면 도성벽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글씨는 예전에 도성을 쌓을 때 참여했던 사람들, 책임자의 이름이 적여있는 거라고 한다. 도성을 짓다가 도망 가는 사람을 방지하기 위해, 또 도성을 책임지고 짓게 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도성을 짓다가 이 부분이 무너지면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 다시 복구했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도 조상들의 이런 지혜를 일찍이 본 받아 책임자가 책임지고 공사를 했다면 옛 성수대교 사건이나 삼풍 백화점 사태는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청운대 도착 즈음에 만나게 되는 팥배나무. 올라오면서 보이길래 무슨 나무일까 궁금했는데 이곳에 오니 팥배나무라고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다.
청운대. 이곳은 정상은 아니지만 또 다른 북악산의 한 봉우리. 이곳에서도 시원한 경치를 볼 수 있다.
단풍 절정일 시기에 오면 더 멋있을 것 같다.
다시 힘을 내 도성을 따라 다시 길을 떠났다.
도성의 돌들을 보면 크기도 다양 색도 다양하다. 돌의 모양이 다듬어 지지 않을수록 더 옛날 돌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 기술이 발전해서 돌을 다듬는 기술도 좋아진단다. 그래서 돌의 모양을 보면 시대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남산코스에 가면 4명의 왕을 거치며 쌓았던 성의 돌들을 한번에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에 가가될 남산 코스도 기대가 되는 군..
성벽 밖으로 돌다가 암문을 통해 성안으로 다시 들어감.
예전에는 이런 암문을 통해서 성안의 시체를 밖으로 옮겼다고 한다. 시체는 정상적인 문을 통해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던 탓이라고 한다.
성안에 펼쳐지는 산책로.. 나무와 벗 삼아 사색에 잠기기 딱 좋은 날이다.
지금껏 걸어온 도성길..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광경.
이렇게 성벽을 낮게 가깝게 보니 성벽같이 않아 보인다. 성벽이 높지 않아서 옥계석을 손으로 바로 밀어보고 싶은 장난끼가 발동한다. 물론 실행하지는 않았다. 옥계석은 성벽의 지붕같이 생긴 모양의 돌이다.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옥계석을 밀어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아기자기한 지붕 같은데 무시무시한 공격 도구 였구나..
백악곡성에서 바라 본 경치.
사진에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사진에 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왼편으로 두번 내려오면 보이는 봉우리에 무슨 사연이 있다는데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다. 힝...
백악산 뒷편으로는 평창동이 있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군대 쌀을 보관했던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때의 지명을 그대로 따서 지금도 평창동으로 불리는 거라고. 왕십리, 답십리, 말죽거리 등도 다 옛 사연이 담겨 있는 지명이라는데 이런 것도 알고나서 그 지명을 다시금 떠올려 보니 신기함이 마구마구 생긴다. ㅎㅎ
백악곡성에서 숙정문을 향해 다시 출발. 숙정문을 지나면서 부터는 소나무가 많이 보인다. 내려 오는 쪽으로 소나무 군락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길을 따라 내려오게 되면 만나게 되는 촛대바위. 광화문과 일직선으로 맞닿는 곳에 있는 바위라고 한다. 그 탓에 일제시대때 우리의 정기를 끊어 놓기 위해서 말뚝을 박았단 이야기가 있단다. 지금은 뽑아서 없지만 실제로 말뚝을 받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뿌연 미세먼지 탓에 잘 보이지 않지만 사진 흐린 저편으로 광화문과 광화문로가 보인다. 지금에서야 저곳이 번화가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만 옛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성밖 일반 백성들이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곳이었다. 이런걸 보고 격세지감이라고 하나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도로가 일직선으로 곧게 나 있는데 한양 도성을 지을때는 광화문 거리가 곧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고 한다. 관악산의 화기가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다시 성곽을 따라 걸어내려오면 성벽 저편으로 성북동이 보인다. 사진속에 초록색 지붕도 보이는데 저곳은 삼청각이다.
도성과 어우러진 소나무들, 성밖으로 보이는 경치들을 보고 내려오다 보면 어느덧 숙정문에 도착한다.
후대에 만들어진 망루. 딱봐도 인위적이다.
아래 사진은 숙정문의 현판. 보통 현판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글을 쓰는데 이 현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이 써져있다. 이 현판은 박정* 대통령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직접 쓴 글씨로 현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역사적 고증을 거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숙정문 사진
숙정문을 바깥쪽에서 바라보고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벽은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그림이다. 도성길을 걷다보면 옛 조상들의 땀과 피로 쌓아올렸을 법한 오랜 기간의 숨결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또 다른 감동이 밀려온다.
앞, 옆 주변 경관을 감탄하며 도란도란 내려오다 보면 어느덧 말바위 안내소에 다다른다. 이곳에 화장실이 있으니 그동안 참았던 볼일을 이곳에서 해결(?)하면 된다. 난 복잡해서 들어가 보지 않았는데 안쪽에 손 씻는 곳은 따로 없다고 한다.
내가 처음 출발했던 창의문안내소나 이곳 말바위 안내소에서 한양도성 해설 프로그램 출발하게 된다. 신청하는 그룹마다 다를 듯 하다.
말바위 안내소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3시간 이었다. 아직 혜화문 까지 가지 않았으니 안내문에 나온 시간보다 더 걸리는 듯.. 아마도 나이드신 어르신들, 아이들과 함께 다니느라 여유롭게 쉬고 여유롭게 다녀서 인듯 하다. 그리고 우리를 인솔해 주신 분이 설명을 넉넉하게 해주도 했고 말이다. 말바위 안내소를 빠져나와 다시 혜화문을 향해 걷기 시작.
가다보니 뽕나무 열매 오디가 주렁주렁 메달려 있는 나무가 보였다. 잎을 보니 뽕나무는 아닌것 같고 열매는 뽕나무 같은데 도통 무슨 나무인지.. 해설하시는 분께서 나의 궁금증을 아셨는지 '오리나무'라고 설명해 주셨다.
오리마다 한그루씩 심어서 거리를 가늠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굳이 오리마다 표시를 할 필요가 없어 이 나무를 잘 볼 수 없다고 한다. 옛것이 사라지는 것 같은 마음에 아쉬움이 들었다.
조금 더 내려오면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이곳은 성안에서 성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성벽 위로 나무계단 길을 만들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여유롭게 주변을 볼수는 없었다.
나무 계단길을 지나 성밖으로 나오게 되면 와룡공원을 지나치게 된다.
내려오다 보니 대나무로 만든 울타리 같은게 보였다. 표지판을 보니 취병이라고 써 있었다. 취병? 취한 병사인가? 처음 들어보는 용어였다.
취병은 조선시대의 독특한 조경기법이라고 한다. 식물을 소재로 만든 친황경 울타리로 궁궐의 핵심 지역과 일부 상류층의 정원에만 사용되었고,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가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취병은 일제강점기 이후 실물이 사라졌으나 창덕궁 후원에 복원된바 있다고 한다.
어느 곳을 가던 일제시대의 그림자는 떨칠 수 없나보다. 그 시대의 아픔 또한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과거이자 미래이다. 다시는 그 시대의 아픈 과거가 발생하지 않도록,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준비해야겠다.
와룡공원 산책길도 가을이라 그런지 예뻤다.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예술이 되는 가을이다.
와룡공원 초입새에 오니 둘레길 안내판이 보였다. 산책로에 대한 안내도 나와 있었다.
이 곳을 지나치면 서울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이 곳부터는 일반인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와 도성이 맞닿아 있었다. 도성 옆 쪽이라 개발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도 도성과 단풍 나무와 옛스러운 집들이 한데 어울려 한폭의 그림 같았다.
가을의 정취를 한창 느끼며 내려오다 보면 도로까지 내려 오게 된다. 아직 혜화문에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큰 길이 나와서 뭔가 싶었는데 개발로 인해 도성이 끊긴 부분이었다.
이렇게 끊긴 도성을 알리기 위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길을 건너 경신고등학교 뒷길 쪽으로 가면 혜화문으로 가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쪽 길을 쭉 따라서 성벽이 남아 있었다. 예전 난개발로 인해서 성벽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도 많고 이렇게 건물들의 외벽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은 이 성벽을 살리기 위해 지자체, 개인들이 뜻있게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반가울 따름이다.
성벽 옆쪽으로 미니정원도 꾸며져 있었다. 미니 라는 말이 어울리게 정말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길가에 이름모를 꽃도 나를 반겨주는 듯 했다.
얼마가지 않아 오른쪽 편으로 작은 주차장이 있는데 그 쪽 끝편으로 가면 담장 너머로 오래된 한옥이 보인다. 한옥을 개발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런 노력이 옛 한양과 현재의 서울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도 서울에 오면 옛 성들과 현재의 빌딩들이 한 곳에 어울러져 있는 걸 신기해 한다고 했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혜화동 길을 쭉 따라 걸으면 지금 내가 도성 투어 중인지 마을길을 걷고 있는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만큼 한양 도성이 많이 파괴되어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총 18km의 길이중 실제 남아 있는 곳은 11km 남짓이라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길을 걷다보면 천주교와 관련된 건물들이 제법 보이는데 다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는 거라고 한다. 한 나라에 종교가 들어올 때 보통 의학이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 학교를 지어 교육을 하게 되고 그 다음이 종교에 대한 포교 활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와 천주교가 들어올 때 한양의 동쪽으로는 기독교, 서쪽으로는 천주교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혜화동 쪽은 천주교가 많고 정동 쪽은 기독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고 한다. 이런 것도 한양 도성 투어를 해야 알 수 있는 이야기 같다.
곳곳에 남아있는 한양도성 흔적.
위쪽 사진에 기와처럼 살짝 나와 있는 곳은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시대때 한양 도성을 난 개발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도성벽을 한쪽 벽을 삼아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도성이 망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배고픈 백성들이 나라 잃은 후에 그나마 집의 한쪽 벽이라도 삼아 줄 수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도성의 위로이기도 한듯 하다.
끊어진 성벽을 뒤로하고 조금만 가면 드디어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으로 이름 지어졌는데 중종때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본래 혜화문이 있던 곳으로는 도로가 나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래서 도로에 성문을 복원할 수 없으니 그 옆쪽으로 지금의 혜화문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혜화문을 뒤로 하고 오늘의 한양도성 해설과 함께한 여행이 끝이 났다.
어렸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역사를 마주할때마다 느끼는 감정.. 600년의 세월을 지내온 조선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니 놀랍고 흥분되는 경험이다.
오래된 도성의 돌들이 왠지 나에게 현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라 응원해 주는 메세지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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