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가볼까

소수서원 -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

쑤깨비 2017. 12. 8. 09:00

소수서원

위치 :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 소수서원에 대해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건립당시에는 백운동 서원으로 불렸으나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사액서원이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소수'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출처 : 영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이번에 경북 영주, 안동을 여행하게 되었다.

그 여행의 첫번째 장소..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뭐든 최초가 중요함.. 끄덕끄덕

소수서원 들어가는 입구.

문화재 관람료. 어른 3천원, 청소년 2천원, 단체 및 지역주민 할인, 경로 및 국가 유공자등 무료. 할인 혜택을 받으려면 신분증이 필요하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입장료가 무료이다.

해설이 필요한 경우 소수서원 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소수서원 해설도 신청할 수 있다.

관람시간

뭐든 겨울에는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 해가 짧아 입장시간이 5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 짧아진 해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는.. 쩝..

소수서원 입구..

양 옆으로 오래되 보이는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매표하고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와~' 가 절로 나온다.

입구쪽 이 일대가 학자수림(學者樹林) 이라고 한단다. 이 소나무들은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인데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말 지나기만 해도 세월의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입구를 조금만 걸어가면 오른쪽 편에 나오는 숙수사지 당간지주.

그럼 당간 지주라는 뭘까?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다.
당간지주는 당을 메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이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을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 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 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서원이 세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쉽게 말해서 당간지주가 있다는 건 이곳이 본래 절터였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숙수사지 당간 지주를 지나면 경렴청으로 향한다.

참고로 이곳 소수서원 내부 안내도를 올린다.

경렴정을 가다보니 죽계수를 건너는 징검다리가 보이고 조금 더 지나니 건너 취한대가 보인다.

이름만 들어도 경치에 취할것 같다.

취한대는 돌아나오는 길에 가보도록 하고 지금은 아쉬운 대로 멀리서 바라만 보는 걸로.

취한대를 보고 경렴정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경렴청 바로 옆에 큰 은행나무가 보였다. 동시에 아이들이 '윽~ 응가냄새'를 외쳤지만.. ㅎㅎ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였나보다.

소수서원은 이곳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나무들이 있었다. 입구쪽 학자수림들이 그러했고 이 은행나무가 그러했다.

사진으로는 감이 안오겠지만 한사람 팔둘레로도 감당이 안될 두께이다. 나무를 보며 경이롭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옆쪽으로 있는 경렴정.

정자이름은 북송의 철학자인 염계 주돈이를 추모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시연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이었다고 한다.

경렴정 앞쪽에 있는 비석인데 한자를 못 읽으니 뭔지 모르겠다. ㅡㅡ;;;;

그 옆쪽에 있는 상생단.

상생단 설명 [매년 음력 3월, 9월(초정일) 제향때, 희생(犧牲)을 간품(看品)하여 사당에 드리던 제단터]

지도문을 지나면 이제 강학당을 만나게 된다.

강학당을 보기 전에 서원의 영역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서원은 크게 2개의 영역으로 나뉜다고 한다. 강학 영역과 제향 영역.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고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영역이다. 서원마다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의 위치가 다르다고 한다. 강학영역이 앞쪽에 있고 제향영역이 뒷쪽에 있는 경우와 제향영역이 앞쪽에 있고 강학영역이 뒷쪽에 있는 경우가 있단다. 서원의 지형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배치가 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본 소수서원, 병산서원 모두 강학 영역이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 소수서원 강학 영역에는 강학당, 일신재 직방재, 지락재 학구재,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에 따라 배치되었다고 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깨어있는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서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는 의미가 있단다.

이번 영주, 안동 여행을 통해 옛 건축물들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새삼 감동하게 되었다.

<뒷편에서 찍은 강학당 모습>

지도문을 통해 들어오면 강학당 내부를 볼 수 있다. 강학당 내부에는 큼지막한 대들보와 그곳에 걸려있는 현판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 수많은 선비들이 앉아 공부했을 거라 상상해 보니 글 읽는 소리가 어디선가 울려오는 듯 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소수서원 현판. 명종의 어필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 선생의 건의로 명종이 대제학 신광한에게 짓게하여 친필로 사액(賜額)한 현판이라고 한다.

강학당 왼쪽편에는 문성공묘가 있다.

입구가 막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앞쪽에 있는 단풍나무에 눈이 쌓여 문성공묘를 운치있게 만들었다. 음력 3월, 9월(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고 한다.

그 옆쪽으로 보이는 장서각. 지금으로 치면 도서관이다.

요즘의 도서관 규모를 생각하면 정말 조그맣다. 그러나 그 시대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저만큼 채우기도 쉽지 않았을 듯 하다.

그 뒷편으로 전사청과 영정각이 있는데 시설보수 중인지 들어갈 수 없었다.

전사청은 봉향집기(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곳이며, 춘,추 제향 때마다 집사들이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라고 한다.

영정각은 회헌안향 선생을 비롯 여섯분의 초상을 봉안한 곳이다. (회암주희, 회헌 안향, 신재 주세붕,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장서각 오른쪽 편으로는 직방재 일신재가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다. 아이들이 이 건물을 보더니 '와~ 테라스다~' 역시 아이들의 눈이란... ㅎㅎㅎ

직방재와 일신재 오른쪽으로는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지금 내가 관람해서 온 순서가 아닌 이곳 건축의 의미는 지락재부터 시작이다.

건물에 앉아 강학당을 바라보았을 때 지락재부터 시작해 오른쪽으로 점점 업그레이드가 되어가는 의미가 있다.

1804년 성언근이 지은 '일신재기'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대개 학자의 공부는 마땅히 독서를 우선으로 하기 때무에 지락재가 맨 아래에 있고, 독서를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는 학문을 하기 때문에 학구재가 그 오른쪽에 있고, 학문을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일신재가 또 그 오른쪽에 있고,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경(敬)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외면을 방정하게 하기 때문에 직방재가 또 그 왼쪽에 있게 되었다. 직방재가 된 뒤에 편안한 집에 넓게 거처하면서 천하게 교화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강학당이 직방재 앞에 있는 것이다.]

건물들을 배치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일신재와 직방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양식이다.

이곳들을 뒤로 하고 자료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자료관과 이곳이 숙수사가 있었던 곳임을 알수 있는 유적을 볼 수 있다.

자료관에서 보이는 강학당 쪽.

나즈막한 담장과 대나무와 눈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소수서원 사료관.

기폐지학 소이수지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서원과 잘 어울리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서원과 관련된 옛 사료들과 이곳과 관련된 옛 학자들과 관련된 내용이 전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서원들.

이렇게 많은 서원들이 있는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고향 근처에서 서원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는... ㅡㅡ;;;;

소수 서원에서 공부한 사람들. 내가 아는 사람은 없는 듯... ^^;;;;

<소수서원 입사록>

<사마방목>

* 사마방목 :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명부로 소과에 합격한 진사, 생원의 이름, 나이, 본관, 주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선비의 하루>

정말 하루종일 책만 읽는 구나.. 몸 힘들게 일은 안 했을지언정 공부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했을 것 같다. ㅎㅎ

소수서원의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

[ 조선시대의 서원은 유식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 으로 구성되어 사림들이 장수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사림들은 서원 주위의 산수 경관과 건축이 합일할 수 있도록 서원 공간을 조성하였다.
특히 퇴계 이황은 산수가 좋으면서 서원에 주향으로 모실 선현과 연고가 있는 곳이 서원을 건립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하였는데, 소수서원이 바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소수서원이 들어선 곳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이신 안향 선생이 어린 시절 수학하신 곳으로 서원의 뒤로는 영귀봉이 있고, 앞으로는 맑은수수가 흐르며 서원 어디에서든 바라볼 수 있는 푸른 연화산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대다수 서원의 건물 배치는 앞쪽에 학사를 두고 그 뒤에 묘당을 세우는 전학후묘를 따르는데, 소수서원은 동학서묘로서 서쪽에 묘당을 동쪽에 학사를 건립하였다. 이는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위치법인 이서위상(以西爲上)과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른 것이다. ]

보통은 오른쪽 우선인데 옛 우리 조상들은 서쪽을 으뜸으로 삼았다니 언제부터 그런 생각들이 요즘 세대와 교차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서양의 영향을 받은 탓이지 싶다.

예전 종묘를 둘러볼때도 우리 나라는 왕자는 동쪽에 거했다고 했는데(그래서 동궁이라 부름) 이곳에서도 뜻이 통하는 구나.

이곳을 나와서 뒷편으로 가면 숙수사지 출토 유물을 만날 수 있다.

[ 숙수사는 통일 신라시대 초기 창건된 사찰로,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로 보아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축의 '죽계별곡' 애도 실려있다. 세조 3년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 지방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영향으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 입구에는 당간지주가 있고 석등, 주춧돌, 광배 등의 석재 유물들과 25구의 금동불상이 출토 되었다. ]

<영귀천>

영귀천 옆쪽으로 난 문을 나가면 탁청지가 눈앞에 똭!! 자연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

<탁청지>

* 탁청지 :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이다. 퇴계이전인 고려의 숙수사때 부터 못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창석 이준이 군수로 부임하여 다시 판 기록이 전해 온다고 한다.

큰나무들과 오솔길과 담장이 어울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든다.

< 탁청지 쪽에서 바라본 경렴정>

몇백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 나무. 딸 말로는 울퉁불퉁한 부분이 나무가 잘려나간 부분이라고 한다. 수많은 이야기가 지나는 동안 나무 또한 수많은 시련을 함께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쓰담쓰담 위로해주고 싶었다.

나무의 한쪽 옹이에 손을 대고 몇백년의 나무 할아버지의 시간을 나도 느껴보았다.

죽계수 건너편 취한대. 눈발이 흩날리며 취한대의 경치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줬다.

이제 취한대로 가서 우리도 한번 취해 볼까?

취한대로 가기 전에 보이는 경자 바위.  경(敬)과 백운동(白雲洞)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밤만되면 혼령들이 울게 되므로 연유를 물어본즉, 예전에 단종복위(端宗復位)운동 실패로 희생된 넋들이었습니다. 주세붕이 날을 택해 위혼제(尉魂祭)를 드리면서 경(敬)자에 붉은칠을 한 뒤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敬)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로써 원귀들의 한이 위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처 - 영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

세조3년 때 단종 복위 거사 실패로 이 일대 영주 순흥 사람들은 정축지변이라는 화를 당하게 된다고 한다. 그때 마을이 없어질 정도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리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단다.

한번 줄을 잘못 서면 정말 멸문지화를 당하는 구나.. 빨간 경이란 글자가 왠지 피로 보이는 순간... ㅡㅡ;;;;

다시 바라본 취한대가 신비스럽기 까지 하다.

이제 죽계를 건너 취한대로 출발.

취한대는 퇴계 이황 선생님이 이름 지으셨다고 한다.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송취한계의 비취 취(娶) 자와 차가울 한(寒) 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곳에 오니 반대편에서 보지 못한 또 다른 경치가 펼쳐진다.

되돌아 오는 길에 다시 본 취한대. 취한대는 어느 곳에서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신비롭고 묘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듯.

선비촌도 있고 소수서원 박물관도 있는데 우리의 이번 여행을 위해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내린 눈이 반짝이 가루 마냥 흩어지고 오래된 적송과 수백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름 모를 나무, 자연과 동화되어 은은한 맛을 더해 주는 서원, 서원이란 공간에서 마음의 평안과 자연의 멋을 원없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 혼자만의 시간 여행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