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에 대한 이야기
종묘
지하철 종로3가역 11번 출구로 나오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입장료 (만25세~만64세) 1000원.
매주 화요일 휴관.
보통은 월요일에 휴관인 곳이 많은데 이곳은 화요일 휴관이니 유념해 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문화가 있는 날은 자유 관람으로 관람 시간이 따로 없는데 그 외의 날들은 시간제로 관람할 수 있으니 그것도 염두에 두고 종묘 둘러볼 계획을 세워야 한다.
*참고 신주란?
몸을 떠난 영혼이 의지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상징물이고, 신주의 상하 전후 좌우로 통하는 구멍으로 혼이 머무는 곳이다. 묘호, 시호와 더불어 왕의 경우에는 존호, 왕비의 경우에는 휘호를 적는다. 왕의 신주는 서쪽에 두고 백저건으로 덮고, 왕비의 신주는 동쪽에 두고 청저건으로 덮는다.
입구에서 맞아주는 외대문
이날은 하늘은 맑고 좋았는데 밖은 불볕 더위였다.
입구쪽부터 쭉 펼쳐지는 돌길.
길은 하나인데 그 길이 셋으로 나뉘어 있어 특이하다 했는데 다 뜻이 있었다.
가운데는 신이 다니는 길.
가운데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통행을 자제해 달라고 안내판까지 있다.
조상을 모셔놓은 사당 같은 곳이라 그런지 이곳에 계신 분들은 나름의 신념들이 강하셨다.
가운데는 신로,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길, 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길.
왕이 다니는 길은 아무나 다닐 수 없고 세자가 다니는 길은 고위급 관리들도 걸을 수 있었다 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 편에 인공 연못이 나온다.
이름은 중연지.
연못의 모양은 네모.
가운데 모양은 원.
그 곳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향나무.
네모 모양은 땅을 뜻하고 원모양은 하늘을 뜻한단다.
향나무를 심은 이유는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를때 사용되는 나무가 향나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인공연못이어도 물이 계속 솟구쳐 흐르고 물길을 따라 넘쳐 흘러가서 물이 맑게 유지가 되었다고 한다.
신성한 곳이라 여겨 물고기도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수풀도 자라지 않을 정도로 맑은 곳이었는데 5호선이 뚫리고 청계천쪽에 물이 모이면서 물길이 막혀서인지 지금은 스스로 자정이 되지 않아서 일주일에 2번 정도 인위적으로 물을 갈아 준단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은 정말 머리가 좋으셨던 분들 같다.
쭉 설명을 들으며 돌아다니다 보면 종묘는 음과 양의 조화를 중시하며 만들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의미가 담겨있어서 그냥 관람하는 것보다 내용을 알고 보면 관람이 더 재밌을 거다.
연못의 오른쪽편에 있는 향대청 일원.
왕이 와서 조상을 생각하며 묵념을 하는 곳이란다.
그 옆쪽 편으로 조그만 신당이 있는데 공민왕 신당이다.
본래 종묘는 조선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공민왕은 고려의 왕이었다.
왜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의 신주를 모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으나 원나라를 배척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세우려 노력했던 왕이었기에 고려의 백성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는 있다고 했다.
종묘를 지을 당시 북쪽에서 쎈 바람이 불어오면서 공민왕의 영정이 날아와서 신당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설일뿐이다.
향대청 일원 안쪽으로 가면 실제 제사를 지낼때 제사상의 모형이 있는 곳이 있다.
앞쪽 테이블은 술.
각각의 다른 모양의 그릇들인데 각기 다른 술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제사상에도 음과 양의 조화의 뜻이 담겨있단다.
앞줄은(사진기준) 술이아닌 정화수가 담겨있고 뒷줄은(사진기준) 실제 술이 담는다고 한다.
정화수는 양, 실제 술은 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뒷쪽 테이블에도 오른쪽(흰그릇)에는 마른 음식.
왼쪽편(검은 그릇)은 젖은 음식을 두는데 마른 음식은 양, 젖은 음식은 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주가 3개가 있는데 난 가운데가 왕의 신주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예상을 뒤엎고 왼쪽편(사진기준)이 왕의 신주라고 한다.
가운데가 첫번째 부인, 그 오른쪽편이 두번째 부인의 신주이다.
제일 왼쪽에 놓는 것도 음과 양의 의미가 담겨 있다.
왼쪽은 음, 오른쪽은 양.
왕이 죽으면 음의 기운을 갖게 되므로 제일 왼쪽에 왕의 신주를 먼저 모신단다.
이런것도 의미를 모르면 그냥 놓았다 보다 생각 했을 것 같다.
향대청 일원을 나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재궁 일원이 나온다.
이곳은 임금이 와서 제사 지내기 전날 묵었던 숙소이다.
이 옷은 평상시 왕이 입던 곤룡포와는 다른 옷이다.
제사를 지낼때 입는 옷이라고 한다.
머리에 쓴 모자에 달린 구슬의 개수가 1줄달 12개, 그 줄이 앞쪽에 12줄, 뒷줄에 12줄.
그래서 총 구슬의 개수가 288개 란다.
288도 뭔가의 의미가 있을텐데 그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다.
이 건물의 오른쪽 편이 세자가 묶던 곳, 이 건물의 왼쪽편은 제사를 지내기 전 왕이 몸을 씻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윗쪽으로 올라가면 종묘의 메인 장소인 정전이 나온다.
정전의 문을 들어가기 전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은 전사청 이다.
전사청은 제사 음식은 준비하던 곳이다.
전사청 앞쪽에 보면 왼쪽에 큰네모, 오른쪽에 작은 네모가 있다.
오른쪽 작은 네모는 밖에서 90일 동안 기른 양, 소 등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져 왔을 때 상태를 확인 하는 곳이라고 한다.
왼쪽 작은 네모는 제사 음식을 만든 후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 졌는지를 확인하는 곳이라고 한다.
옛 왕들께 지내는 제사여서 그런지 뭐든 쉽게 하는게 하나도 없었던 듯 하다.
재궁에서 전사청 쪽으로 오는 길에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자란 곳이 있다.
이곳은 키가 165cm만 넘어도 머리가 닿을 정도이다.
예전에 이성계가 이곳을 지날때 소나무가 알아서 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있다는데 아마도 이성계를 더 멋진 위인으로 포장하기 위한 설이 아니었을까?
중요한 정전을 들어가기전.
정전에 관한 열공.
이곳에서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밥 올리는 곳에 밥 대신 생쌀을 올렸단다.
불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조리된 음식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술이 담은 그릇이 3개가 있는데 첫번째 술은 술을 담근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탁주, 두번째 술은 막걸리, 세번째 술은 청주를 올린다.
탁주는 왕이 올리고 막걸리는 세자가 올리고 청주는 영의정이 올린다.
처음부터 독한 술을 올리면 안되니 약한 술부터 독한 술 순서대로 올린다고 한다.
제일 윗쪽 사진의 가운데 네모 그릇에는 고기가 올라간다.
아래 사진은 정전의 신위 봉안도.
지붕이 낮은 곳에는 신위가 안 들어가고 지붕이 높은 가운데 19칸에만 신위가 들어가 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왼쪽은 음의 기운. 신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왼쪽부터 차례대로 채웠다.
이 신위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쪽에 더 자세히 적도록 하겠다.
이제 드디어 정전에 들어갈 수 있구나.
전사청 앞쪽에 있던 것처럼 이곳에도 큰네모, 작은 네모가 있다.
큰네모는 왕이 서서 절하는 곳, 작은 네모는 세자가 서서 절하는 곳이다.
정전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4번 절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정전의 앞모습을 보기전에 뒷쪽편도 공부해야 한단다.
갈길이 멀구나 ㅠ.ㅠ
먼저 벽을 살펴보면 벽이 벽돌로 가려져 있다.
보통의 궁을 살펴보면 앞뒤쪽이 바람이 잘 통하도록 시원하게 뚫려 있는데 이곳은 벽으로 막혀 있다.
기둥이 있음에도 벽으로 막아둔 이유는 귀신이 어두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둡게 하기 위함이 첫번째 이유요, 혹시나 불이 날때를 대비한 방화벽의 역활이 두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아래쪽 네모 구역은 왕이 술을 올린 후, 세자, 영의정까지 술을 다 올린때까지 곧 모든 제사가 끝날때까지 대기하던 곳이다.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에 끝난다고 하니 왕도 못할 노릇이다.
그리고 정전의 뒷쪽 벽쪽은 왕이 죽고 3년상 치르는 동안 임시 신주로 사용하던 뽕나무 신주를 묻었던 무덤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궁의 뒷쪽처럼 예쁘게 꾸미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계단을 따라 드디어 올라 가는 구나.
가운데는 왕, 오른쪽은 세자, 왼쪽은 신하들.
해설하시는 분은 이 세길도 아닌 그 옆 계단으로 오르셨다.
대단대단~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는 정전.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긴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지만 얼마전까지는 세계에서 옆으로 가장 긴 건물이었다고 한다.
맑은 하늘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는 곳이라 옛 궁궐마냥 화려한 맛은 없으나 자연과 어울리는 은은한 멋이 있다.
1개의 집인 봉당 형태의 건물로 사진에는 자세히 안 나왔지만 문을 열 수 있는 빗장은 1개밖에 없다.
그 빗장을 열면 안쪽으로는 전체가 다 연결된 구조라는 거다.
총 3명의 왕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처음에는 태조가 7칸 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선조 임금때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던 것을 광해군이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2명의 왕이 건물을 증축해서 지금의 19칸 짜리 건물이 완성 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짓기 시작했는데 정작 본인은 들어가지 못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정전의 앞쪽에도 건물이 2개 있는데 정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편은 공신당.
83명의 신하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왼쪽편의 건물은 칠사당.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무탈하게 잘 풀리토록 계절과 관계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정전의 왼쪽편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조그만 벽난로 같은 것이 있는데 이곳은 제사에서 나온 것들을 태우는 곳이라고 한다.
정전을 지나 왼쪽 편으로 가면 영녕전이 있다.
이곳은 예전에는 종묘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후대로 넘어오면서 둘다 묶어 종묘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실이 정전보다 규모가 작다.
정전에는 왕 19명, 왕비 30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영년전에는 왕 16명, 왕비 18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두 곳의 신주를 합치면 83개의 신주인데 공신당에 모셔져 있는 신주의 개수도 83개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신의 계획인지 신기하다.
조선은 27대 왕이 다스렸다.
연산군, 광해군은 종묘에 들어오지 못했으므로 2개를 빼면 왕의 신주는 25개여야 하는데 종묘에 있는 왕의 신주는 총 35개 이다.
10개의 신주가 더 있다는 말이다.
10개중 1개는 영친왕의 신주이고(고종의 7번째 아들) 나머지 9개는 왕이 되었으나 아버지로 부터 정식 왕을 물려 받지 않은 왕이어서 친부를 왕으로 추대하고 이곳에 신주를 모시게 되었단다.
그래서 총 35개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처음 종묘를 들어왔을 때부터 들던 의문이었는데 나중에 해설해 주시는 내가 묻기도 전에 설명해 주셨다.
사진을 보면 문이 어깃장 놓은 것 마냥 아귀가 맞지 않는다.
첫번째 이유는 귀신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습기가 차지 않도록 환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드디어 길고 긴 종묘의 여행이 끝났다.
날이 더워 걷는게 힘들었지만 내가 몰랐던 내용들을 알게 되어서 재밌고 유익한 시간 이었다.